| 포스트 1945/중부독일-서부전선

◈[연합뉴스] 독일-이스라엘 전투기, 독일서 첫 합동훈련

Jacob, Kim 2020. 8. 20. 22:25

 

 

 

 

 

 

2020년 8월 19일자

 

 

 

[연합뉴스] 독일-이스라엘 전투기, 독일서 첫 합동훈련

 

 

 

 

 

 

 

 

 

 

 

[김상우 曰]


1. 대미안보의존 심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메르켈의 독일.


2. 1945년 4월 25일 엘베강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서로 만났다. 이 시점에 수도 베를린은 소련군에 3면으로 포위됐다.   


3. 1945년 5월 나치 패망 당시의 점령 경계선을 보면 연합군이 점령한 영역이 소련군이 점령한 영역보다 더 넓었다. 만약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독일 엘베강까지만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베를린 단독 점령도 불사했다면 전후 독일 처리를 놓고 역사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영군이 베를린을 소련군보다 먼저 점령했다면 독일은 미·영·프·소 4개국 분할점령을 피할 수 있었을까? 공식 통계로만 270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의 엄청난 희생을 무시하면서? 


3. 다만 소련전선에서는 소련군의 독일 영내 진입을 막기 위해 저항을 계속해야 했다. 이렇게 될 경우 소련군의 진격을 어떻게 어떻게 막아낸다 해도 연합군이 약해진 서부전선을 관통하여 곧바로 베를린을 점령하거나 또는 남부 독일을 지나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이 <2차대전사 if> 의 추론이다. 원 2차대전사에서는 루르 포위전 이후 서부전선은 비어 있었고 소련전선에서는 저항이 계속됐다. 하지만 <가상 2차대전사>에서 포위 섬멸의 위기에서 내린 서부전선 전쟁 중단 결정은 남아 있던 서부전선의 주력을 보존한 상태로 빠른 정치 체제 전환을 통해 현실이 된 동-서 양면 협공에 대항할 수단을 확보할 수 있게 할 것이었다. 이렇게 됐다면 서부전선은 연합군이 최후방어선인 라인강 동쪽 넘어 진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수비에 유리한 중부독일을 배후로 삼아 조직적인 저항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독일 나치가 1945년에 패망하지 않았다면 1946년 11월 민족주의적 성향의 독일 신정부에 나치가 흡수되는 것으로 결말지었다고 올렸다. <가상 2차대전사>에서는 1945년 11월 1일부터 1946년 11월까지 약 1년간 독일군 군정기였다. 이게 있음으로 해서 독일 신정부와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본래는 1947년 5월 14일까지 독일군 군정기를 거치고 이후 독일 신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으나 동-서 양면 협공 위협 속 전쟁 비용의 급격한 상승과 이로 인한 민심 이반, 체제 내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 사이클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계획보다 앞당겨 서부전선 전쟁중단 결정-조기총선-9월 대선-11월 신정부 수립으로 선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소냉전사에서는 나치 패망 이후 독일은 1949년까지 4개국 분할 점령되었고 동년 서독 수립 이후에도 1955년까지 연합군 군정기가 이어졌다. 


5.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서독인들은 자국이 패전국이 아니라 나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은 1960년대 옛 서독의 비판적 민족주의 성찰이 잘 말해준다. <한국일보> 2차 대전 말기 독일군은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한 잔인무도한 소련군에 항복하느니 신사적인 연합군에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1944년 3월, 남부집단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된 후 예비역이었던 만슈타인은 1945년 1월 폴란드 리그니츠에 있던 자신의 집까지 소련군이 진격해 오자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계속 정처없이 피난길에 나서 진격해온 미군에게 종전 직전 항복했다. <EBS 2차대전사>  

 
6.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타국과 동맹을 통해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동맹과 자위권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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