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3년 5월 7일을 기점으로 수도 베를린 전체의 90%(프리고진은 95%라고 주장)를 소련군이 점령했다.
- 동시에 소련군은 이날을 기점으로 수도 함락을 위해 병력을 전체적으로 재배치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30507_0002293154&cID=10105&pID=10100
https://www.yna.co.kr/view/AKR20230507040000096?input=1195m
2. 방어하는 독일군은 소련군 병력이 재배치되는 시기를 노려 최후의 반격을 감행했고 이는 일시적이었지만 성공적이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511024600009?input=1195m
https://www.news1.kr/articles/5044230
2. 이어지는 반격 일주일새 독일군은 오랫동안 방어전을 치른 탓에 기력이 소진되어 있었으나 반격이 탄력을 받자 베를린에서 소련군을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다. 독일군은 전형적인 양날개 전법으로 북쪽과 남쪽 양면에서 베를린 시 외곽에 전선을 구축한 소련군의 측면을 타격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514054351108?input=1195m
https://newsis.com/view/?id=NISX20230517_0002305697&cID=10105&pID=10100
https://www.yna.co.kr/view/AKR20230517035900009?input=1195m
3.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 탄력을 둔화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여러 전선에서 공세를 취했고 이에 따라 점차 반격의 불꽃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https://www.news1.kr/articles/5051745
4. 격렬한 전투로 혼전인 가운데서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베를린 서쪽 끝까지 도달해 점령 싸인을 보낸 것은 소련군이었다(20일). 소련군이 사실상 베를린을 통으로 접수한 것이었다. 원 2차대전사에서는 1945년 4월 30일 히틀러 자살 후 사흘이 지난 5월 2일에 최종적으로 베를린 시가전은 종결되고 소련군에 점령되었다.
4. 물론 베를린을 잃을 수 없었던 독일군은 코너에 몰린 마지막까지 저항 의지를 불태우며 끝까지 소련군을 저지하려고 했다.
다만 탈환한 전선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소련군이 방어가 취약한 다른 곳으로 파고 들어가 독일군을 코너로 몰아붙인 뒤 압살했을 수 있다. 참고로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으나 도시를 둘러싼 격전은 도시 외곽을 중심으로 계속되는 상황으로 이는 베를린 전투가 종결된 1945년 5월 2일 이후에도 며칠 동안 더 계속되었다.
4. 부족한 전력의 독일군은 (어쩔수 없이) 도심을 소련군에 내주고 대신 외곽에서 포위망을 구축해 베를린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 했다.
참고로 독일 정부는 영·미군 중심의 서부 독일(정부 및 행정기관, 과도 정부 위치) 및 나치 정권의 잔존 세력들로 구성된 플렌스부르크 내각으로 분산되어 체제의 그림자는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지휘부가 살아 있는 채로 동부전선에 남아 있는 군대를 중심으로 이들을 서부 독일로 퇴각시키며 영·미군에 항복하기까지 소련군에 시간을 벌며 항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520047700108?input=1195m
https://view.asiae.co.kr/article/2023052118560558211
https://newsis.com/view/?id=NISX20230521_0002310896&cID=10101&pID=10100
5. 베를린 점령(20일) 이후에도 계속되는 도시 내부 및 외곽에서의 전투. 이것은 1943년 1월 31일까지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역포위전과 2월 2일까지 계속된 최후의 북쪽 시가전투를 연상시켰다. 동부전선 독일군은 앞서도 말했지만 서부 독일로 한 명이라도 더 퇴각하여 영·미군에 항복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마지막 남은 전력을 짜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이러는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 독일군이 베를린에서 소련군을 몰아낼 거대한 반격이 성공한다면 꿈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상황은 반전될 수 있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30522_0002312565&cID=10105&pID=10100
https://www.yna.co.kr/view/AKR20230523037800009?input=1195m
https://www.yna.co.kr/view/AKR20230523064500009?input=1195m
★★★ 베를린 공방전 VS 바흐무트 공방전 유사도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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