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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 만슈타인 장군 中에서 Chapter 3. 평가 부분 발췌

Jacob, Kim 2018. 8. 6. 03:32






나무위키 : 만슈타인 장군 中에서 Chapter 3. 평가 부분 발췌 [문서보기]


▶위 문서에서 역자에 의해 수정, 보완된 부분만 발췌하였습니다.



가상 2차대전사에서는

   1. 방어전투하면서 중부집단군 재건 실시 (잔존 중부집단군 병력에 1.5배 규모)

   2. 8월 중순 이후에(9월 경) 기존 중부집단군에서 병력 분할을 통해 비스툴라 집단군 구성

   3. 중부집단군은 새로 구성된 비스툴라 집단군*에게 중앙전선 방어를 넘기고 폴란드 동부 연안으로 이

       동독일 본토에서 편성중인 후방 병력들을 배속받고 후방 방어선 구축 및 유지

     * 9월 26일까지 계속 중앙군 전선에서 전투가 이어졌기 때문에 원 2차대전사에서 그랬듯이 완전 편성

         이 되지 못한 집단군으로 계속 방어전투 수행했다.

   

   ※ 원 2차대전사 : 중부집단군은 1944년 10월 경 소련군의 포위 공격으로 동프러시아 지구로 쓸려 들

        어가 고립됐다. 

 

    ※ 원 2차대전사 : 독일은 1944년 말에 급히 작성된 오데르강 방위 계획에 따라 대전 말 35개 사단 규

        모확장된 무장친위대와 점령지에서 송출되어온 강제노동자 등을 동원해 3겹으로 된 방어선을 구

        축수 있었다.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돈 집단군 편성 상황과 유사


1) 척박한 독일군 병력자원 문제를 겪으면서 부대 지휘

2) 기존 B집단군에서 병력 분할을 통해 돈 집단군 구성해 부대 지휘 





독일군에서 가장 빼어난 장군중 한명이지만 그 역시 독일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극복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역량은 2차 대전에서 손꼽을 만한 군사천재라고 불릴만 하다. 일선 지휘관으로 보인 전과뿐 아니라 참모로서 보인 작전, 전술 부분에서도 탁월했다. 당시 독일군에서 명성이 가장 높았던 에르빈 롬멜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큰 전과를 올린 장군이며, 전체 전황을 체스판처럼 보고 치밀하게 말을 움직이는 듯한 능력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 (중략)




하지만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만슈타인 역시 다른 독일 장군들처럼 단기전, 기동전 범주에서 벗어나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 총력전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주26)


만슈타인도 결국 훨씬 거대한 적을 전술적 우월함으로 단기간에 제압할 수 있다고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든 프로이센의 군인이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건 그저 눈앞의 소련군에게 거대한 손실을 입히고 자기가 있는 전선을 안정시키는 것까지였다. 만슈타인이 눈앞의 전선에서 얼마의 피해를 주던 간에 소련 장군들은 미국의 지원과 자국의 역량으로 빚어낸 방대한 전력을 어디에 어떤식으로 투입시켜야 하는지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결국 다른 전선에 구멍이 뚫리고 종국에는 전선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만슈타인이 명장의 영역을 넘어선 전략-정치 분야를 건드린 사례는 거의 없다. 원수가 되어서도 전략에 정치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는데, 1944년 퇴각과 현지 사수를 놓고 벌인 히틀러와의 논쟁만 해도 군인으로선 합리적이지만 정치인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만을 고집했다.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전력 약화를 감수하고 20개 사단이 종전때까지 주둔하게 했다. 단순히 군사적인 부분만 본다면 동부전선이 이탈리아보다 훨씬 중요하지만 정치적인 부분, 추축국의 안정화에서 바라볼 경우 이탈리아는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폴란드까지 전선을 물린 이후 재편성하자는 1944년 만슈타인의 주장 역시 군사적으론 타당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론 다른 대륙의 일본을 제외한 동맹국을 전부 잃을 수 있는 커다란 리스크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만슈타인의 진술 어디에도 이런 정치적인 요소까지 감안하여 히틀러를 설득하려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비굴한 처세로 1인자 히틀러와는 사이가 안좋았고 충성심을 의심받았다. 그 무시무시한 스탈린과 손발을 맞춘 주코프가 아슬아슬하긴 해도 충성심을 인정받고 직언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앞에서 비굴하고, 뒤에서 욕하는 만슈타인에 대한 히틀러의 정치적, 인간적 신뢰는 제로에 가까워서 그의 발언을 더욱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독일군은 눈앞의 전장을 승리로 이끌고도 다른 전선에서 생기는 구멍을 막지 못했고 끝내 지속적으로 소모되어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주26) 자질 문제를 떠나 한번도 중심국가가 되어보지 못하고 지역강국에 머무른 국가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점이라서 독일, 특히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군들은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T-34와 티거&판터, 만슈타인과 주코프를 비교해보면 왜 독일이 전쟁에 질 수 밖에 없었는지가 드러난다. 독일의 전차와 장군들은 눈앞의 전투에선 눈부셨지만 전쟁에선 마이너스 요소 투성이였다. 독일은 전술적으론 대전말까지 소련을 앞질렀지만 전략, 정치에서의 무지는 전술적 우위로 덮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