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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일 - 북·중 ‘냉전 프레임’에 한국 가두려는 ‘아베의 큰 그림’ [한·일 경제전쟁 특별기고]

Jacob, Kim 2019. 8. 26. 22:40









2019년 8월 6일자





[기고문 전문]





ㆍ외교·안보 관점에서 본 한·일관계





일본 정부가 지난 2일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통해 한국을 ‘백색국가 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통관절차를 간소화해주는 우호국 지위를 박탈한 것으로 한국 경제에 실질적인 타격을 가하겠다는 조치다. 일본 고위층 인사들은 입을 맞춘 듯 하나같이 부인하고 있지만 한국 사법부가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린 데 대한 보복 조치이며, 세계 자유무역 원칙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한·일관계는 비관적 전환점을 맞았고, 우리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만반의 대비가 필요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번 사안의 더 중요한 함의는 대한민국이 살아가야 할 미래의 외교·안보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도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사태 배후에는 일본 외교의 세 가지 중첩된 목적이 내재해 있다. 우선 아베를 필두로 한 집권세력의 이념적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근래에 전 세계적으로 준동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전형으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기저에 깔고 외부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화한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터키의 에르도안, 러시아의 푸틴, 미국의 트럼프 등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백색국가 리스트 제외는 이른바 한국에 ‘백색테러’를 가한 것에 비교된다. 백색테러는 1795년 프랑스 혁명파에 대한 왕당파의 보복을 기원으로 하는데 극우파가 저지르는 테러를 총칭한다는 점에서 아베 정부의 이념은 물론이고, 이번 조치가 지니는 수구적 동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불러도 전혀 비약이 아니다.

두 번째는 2018년 이후 한반도에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평화프로세스에서 소외된 일본의 불안감과 좌절감이 반영되어 있고, 이번 조치를 통해 일본은 여차하면 ‘딜 브레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비핵화 과정에서 일본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한국의 수출규제를 통해 압박하겠다는 의도다. 사실 지금까지도 아베 정부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 과정에서 한·미 사이를 이간질하며 훼방해왔다. 근거도 없이 한국을 대북 제재의 구멍이며, 친중 및 친북 정부로 매도했다.

세 번째는 일본의 미래를 결정할 대외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국력이 수십년 동안 정체된 가운데, 중국은 급부상하는데 미국은 과거의 강력한 패권국 위용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중첩된 양자 동맹과 미군 주둔을 근간으로 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체제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일본의 안보전략이 근본부터 흔들렸다. 미국의 세력이 더 약해지거나 미·중이 협력관계로 갈 경우, 일본은 중국의 세력권에 편입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이 때문에 미·중관계가 갈등 국면일 때 미국의 대중 봉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재무장을 빠른 속도로 추진함으로써 전쟁이 가능한 정상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의도는 오바마 재임 8년간 아시아재균형정책과 함께 미·일 안보 가이드라인을 수정하면서 이미 본격화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등장이 불가측성을 재점화했고, 거기에다 남·북·미의 평화 분위기가 아베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아베 정권은 미·중 갈등이라는 글로벌 변수의 하방압력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상방압력 속에서 결국 가장 자신의 이념과 일치하는 냉전 회귀를 최우선 순위로 선택하고 속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번 일본 도발의 큰 그림은 미·일과 북·중 사이를 선택하라는 프레임에 우리를 밀어 넣은 것이다. 한국이 미·일 동맹의 하부구조로 들어오지 않을 경우 반일 및 반미 국가로 낙인찍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렇게 한·일관계 파동은 일본의 외교·안보의 불안감 발현이자, 동북아 및 국제정치 격동과 맞물려 있다. 미·중은 역사상 명멸했던 패권경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소처럼 완전한 적대관계도 아니고, 미·영처럼 우호관계도 아닌 상황에서 패권갈등을 하고 있기에 불확실성이 커지며 이는 주변국들도 불안하게 만든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도 동북아의 기존 역학관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국들의 전략을 복잡하게 만든다. 일본이 가장 불안해하지만 주변국들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한·일관계의 틈을 중·러 전략을 시험하는 기회로 삼아 영공 침범을 시도한 중국과 러시아나, 연속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북한의 행보도 이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응도 일본을 넘고, 무역규제를 넘어 크게 그리고 멀리 봐야 한다. 미래에 대한 전략적 불안감은 동북아에 남아 있는 냉전 관성에 대한 강력한 유혹을 불러일으키며, 이런 상황에서 아베가 가속페달을 밟은 것이다. 권력을 위해 냉전 프레임을 선호하는 세력들이 우리 내부와 주변국들 사이에 암묵의 연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격동하는 동북아 전략환경이 다시 대결구조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민족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다. 우리는 미·중 패권갈등의 하방압력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면서, 동시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프로세스를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무너졌지만, 동북아에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분단체제였다. 이는 역으로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화협력의 남북관계만 유지하더라도 아베의 시도는 효과를 볼 수 없고, 동북아 안보환경이 냉전 부활로 가지 않도록 막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당장, 교착된 북·미 대화를 조속히 재개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한반도에서 평화가 대세가 되면, 2002년 전격적으로 방북했던, 같은 극우 인사 고이즈미 총리처럼 곧바로 편승할 수 있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대통령 이전에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결기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자존감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극일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운명적 도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말들이 나오지만 대한민국은 독립이 필요치 않은 엄연한 주권국가이므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대신에 우리가 온 힘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은 평화운동이다. 한민족만이 아니라 냉전·수구·비민주세력의 준동에 맞서는 인류의 보편가치와 행복을 구현하는 위대한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결코, 쉽지 않지만, 반드시 이뤄내야만 하는 시대적 과업이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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