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1945/독일-폴란드 분리선

◇[뉴시스] 터키와 미국, 시리아 동부 접경지에서 3차 안전지대 합동순찰+

Jacob, Kim 2019. 10. 10. 13:36






2019년 10월 4일자





[기사 전문]





【앙카라(터키)=신화/뉴시스】김재영 기자 = 터키군과 미군이 유프라테스강 동쪽편의 시리아 북동부 터키 접경지에서 4일 3차 '안전지대' 합동 순찰을 실시했다고 터키 국방부가 말했다.

텔라비아드 부근에서 행해진 지상 순찰은 육상 차량뿐 아니라 UAV(무인 공중수송체, 드론) 장비도 동원되었다고 국방부는 트윗으로 덧붙였다.

터키의 훌루시 아카르 국방장관과 미국의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 안전지대 확립을 전화로 논의한 뒤 합동순찰이 이뤄졌다.




터키는 시리아 동부와 접한 국경선에서 30㎞ 시리아 쪽으로 들어가는 지역을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군사 시설도 없는 지대로 만들고자 한다. 현재 이곳은 터키가 잠재적 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시리아 쿠르드족 반군의 진지가 쿠르드족 거주지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8월7일 터키와 미국은 이곳에 안전지대를 설정해서 '평화 회랑'을 구축하기로 어렵게 합의했다. 미군은 시리아 동부의 IS(이슬람국가) 퇴치 작전에서 시리아 쿠르드족 주축의 시리아민주군(SDF) 및 인민수비대(YPG)에 크게 의존한 바 있어 터키의 접경지 안전지대화에 난색을 표명했다.

나토 동맹 터키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안전지대 구체안에서 상당한 견해차가 상존해 합동 순찰을 통해 이를 해소하기로 했다.

안전지대가 실현되면 인민수비대는 그 남쪽으로 철수해야 한다. 시리아 쿠르드족이 쉽게 응할 사안이 아니다. 터키는 자국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내전 난민 360만 명을 이 안전지대로 복귀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을 압박했다.  


[가상 국가 왈] 만약 소련-독일 나치스가 아니라 미국-독일 나치스와 독-폴란드 국경선 획정을 논의했다면 위 기사와 같은 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됐을 것이다. 무엇보다 2차 대전에서 가장 막대한 인명피해 - 공식 집계만으로도 소련 국민 2,700만명 사망·부상·실종을 냈다 - 를 낸 소련이 빠졌기 때문에 이 국경선 획정은 실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미국은 1차 대전 종전 기준 독일 영토를 기준해서(1945.1.10제작 독일 전도 참조, 위키미디어) 전후 독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영국, 소련과 논의하였다. 그 결과 중 하나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오데르-나이세선 서안을 전후 독일의 국경선으로 정한다고 공표되었던 것 뿐이었다. 




5.20 협상 타결 이후 모두 1,400만 명(다른 자료에서는 1,500만 명)의 폴란드 거주 독일인을 독일 영내로 이주시키는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됐다. 6월과 7월 내내 이어진 방어전 속에서 소련군의 계속된 압박에 소모된 폴란드 주둔 독일군은 전선을 지탱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벌어져 독일 영내 진입을 목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육군 사령부에서는 방어선 유지냐 철퇴냐를 두고 매일 전선 회의가 오갔고, 이 기간 동안 치열한 내부 논쟁을 벌인 끝에 폴란드 주둔 독일군 전선을 서쪽으로 크게 축소하여 재배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어졌다. 8월 중순이 지나면서 원 방어선에서 독일군이 오데르-나이세선 서안 기준 3~20km 범위 안으로 구축 중이었던 안전지대로 철퇴가 시작되었고, 9월 21일로 프로이센(Unit 10.) 외 수 곳을 뺀 모든 지역에서 독일군과 폴란드 거주 독일인들이 폴란드를 빠져나갔다. 이후 10월말에 이르자, 최종적으로 폴란드 영토의 99.5%(종전 직전까지 90%)가 소련과 소비에트 폴란드 공산당에 넘어갔다.






터키의 드론이 합동 순찰 전에 타깃 지역을 모니터했다. 그 뒤 8월29일 양국은 아크카칼레에 합동순찰 센터를 설치했으며 9월6일 첫 순찰을 실시했다.






kj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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