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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문화일보] <뉴스와 시각>6·25 ‘남침 수정론’의 그늘

Jacob, Kim 2020. 6. 27. 21:13

 

 

 

 

 

2020년 6월 25일자

 

 

 

 

 

[칼럼 전문]

 

 

 

 

 

6·25전쟁 70주년 학술회의가 실종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탓이다. 학술회의 때마다 단골로 초청됐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이번엔 온라인 세미나에만 참석할 뿐 한국땅을 밟지 못했다. 커밍스는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6·25전쟁 담론을 학문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명성을 누려온 학자다.

그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내전확전설과 남침유도설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의 주장은 기존 남침론을 부정하는 수정론으로 불리며, 1980년대에 한국 현대사학계를 강타했다. 반미자주화 노선의 운동권은 수정론을 특히 신봉했다. 내부 모순이 폭발한 민족해방전 성격이어서 북 정권 책임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빠진 탓이다.

그러나 커밍스의 수정론은 옛소련이 붕괴한 후 기밀문서가 대거 공개되면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3자의 합의에 의한 계획적인 남침이란 것이 풍부한 자료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특히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1995년 펴낸 책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전쟁의 구조적 기원과 행위적 원인을 엄밀하게 추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커밍스의 수정론이 오류였음을 밝혔다. 한국 학자의 자존심을 세운 박 교수의 역작 이후로 6·25전쟁 담론은 균형을 찾았다.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와 박태균 서울대 교수 등의 연구는 전쟁 전모와 국제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학문적으로는 이미 30여 년 전에 폐기된 커밍스의 수정론이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현 정권 핵심들이 남북 긴장 상태가 불거질 때마다 북에 책임을 묻기보다 옹호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그림자의 실체이다. 이 핵심들은 자신들이 젊은 시절에 숭배했던 수정론의 그늘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북의 잇단 도발로 위기가 고조됐는데, 마지못한 듯 미온적 대응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우리 언론이 그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대해 남북 평화를 해친다며 게정을 부리기까지 한다.

냉전 시대 대립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폭력배 언동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재산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불법적으로 파괴했으면 국제법에 근거해 배상을 논의하는 게 마땅하다. 김여정 북 노동당 제1부부장이 우리 대통령에게 쌍욕을 퍼부었으면 그의 경질을 북쪽에 요구해야 한다. 김 부부장이 ‘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빠지는’ 모양새에 만족하면 금세 또 당할 수밖에 없다.

6·25를 연구해온 석학들이 한결같이 꼽는 교훈은, 이 땅에 또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0년 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학살의 참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북이 핵 무력을 내세우는 상황에서 전쟁은 공멸로 가는 길이다.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교훈은, 북이 오판할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의 철수,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이 공산권 지도자들에게 줬던 시그널을 재현하지 말아야 한다. 북을 옹호하는 태도로 동맹국과의 틈을 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현 정권의 핵심들이 새겼으면 한다. 오래전에 끝장난 커밍스의 수정론 그늘에 발을 두고 ‘우리 민족끼리’를 고집하는 것은 몽상이다.

 

 

 

 

 

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원문보기: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006250103301205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