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4일자
[칼럼 전문]
미국 대선 판도가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의 우세로 바뀌자 국내에서 ‘전략적 인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미국이 허송세월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을 방치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 있다. 이 같은 인식은 트럼프가 승리해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재개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오바마는 정말 북한에 관심이 없었을까. 재임 시절 그의 대북 행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직후 북한과 직접 접촉을 모색했다. 그러나 북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4월5일 오바마가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설파하던 날을 골라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리고 한 달 뒤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취임 첫 행보부터 북한에 모욕을 당한 오바마에게 국내적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그해 12월 특사를 평양에 보내 6자회담 복귀를 설득했다.
북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그해 11월 원심분리기를 공개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뒤 곧바로 연평도 포격 사건을 일으켰다. 대북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오바마는 비공개 접촉을 시도했다. 언론은 물론 의회에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결국 오바마는 2011년 8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뉴욕으로 불러 북·미 고위급회담을 시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두 차례 추가 회담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2·29 합의’다. 이 합의는 북한이 죽었다고 선언한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을 되살리고 비핵화 목표를 재확인한 의미 있는 성과였다. 북한은 또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등 핵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2·29 합의는 북한과의 합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모든 요소가 갖춰진 전범(典範)이었다.
하지만 2·29 합의는 북한이 그해 4월 태양절을 맞아 위성 발사를 감행하면서 깨졌다. 북한은 위성 발사가 평화적 우주 개발의 권리라고 강변했지만, 2·29 합의에 들어 있는 미사일 발사 중단 약속에 위성 발사도 포함된다는 사실은 북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의를 깨고 위성 발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는 권좌에 오른 지 석 달밖에 안 된 김정은의 불안한 권력적 위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29 합의 파기로 얼마 남지도 않은 미국 내 대화론자들은 ‘멸종’했고 오바마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글린 데이비스 협상대표는 언론의 눈을 피하려 한동안 국무부 뒷문으로 다녔다. 그 와중에도 오바마는 백악관팀을 극비 방북시켜 대화 복원을 시도하다 공화당의 비난을 받았다. 오바마 2기도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자 북한은 장거리미사일을 쐈고 2기 행정부 출범 직후에는 3차 핵실험을 했다. 이어 2013년 3월 핵·경제 병진노선 채택, 4월 원자로 재가동으로 내달렸다.
오바마 재임 시절은 북한이 김정일 말기~김정은 초기에 걸쳐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기다. 북한은 그 위기를 핵능력 완성으로 돌파하려 했다. 북한은 일단 핵을 손에 넣은 뒤 뒷일을 감당하겠다고 작정하고 ‘만패불청’의 태도로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렸을 것이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도 2번의 핵실험과 무수한 미사일 발사를 거듭하다 2017년 11월 화성-15형 발사 성공과 함께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폭주를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남북, 북·미 대화에 나섰다. 오바마 시절 대화가 없었던 것은 오바마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대화 국면이 열린 것은 트럼프가 잘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북한의 시간표에 따른 것일 뿐이다.
바이든이 승리해도 대화 기조는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접근법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민주당은 대북협상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 집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처럼 정치적 과시를 위해 이행도 하지 못할 합의문에 도장을 찍고 이후에는 드러누워버리는 무책임한 협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은 다자적 접근, 동맹국과의 조율을 통한 정책을 선호한다. 하지만 민주당의 대외정책은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에 달라진 북한의 핵능력을 감안한 정책을 펼 수도 있다. 따라서 바이든이 이긴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 전략적인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과의 공조는 물론 한반도 미래가 걸린 북핵 협상에서 국익을 지키기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14030004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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