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1945/중부독일-서부전선

◆2018년 6월 23일, 영미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Jacob, Kim 2018. 8. 6. 01:00





가상 2차대전사(11) 영미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2018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영미연합군은 공군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상륙 지점에 대대적인 폭격을 실시하고 영프해협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던 6월 23일 오전에 공군의 엄호 하에 해군 함정과 수송선 등을 투입해 노르망디에 기습 상륙을 개시했다. 앞서 연합군은 지난 4월과 5월 동안 상륙 지점을 독일군으로부터 기만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프랑스 내륙에 있는 교통운반시설들을 집중 폭격하였다. 주1)



[가상 2차대전사] 위 표 하단 빨간 박스를 보면 영미연합군 노르망디 예상 상륙일이 2018년 6월 23일에서 24일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륙 시기 일자 통일을 위해서 이에 하루 앞인 6월 23일로 기재하였다. 원 2차대전사에서 서부전선의 고위 지휘관 대부분이 영프해협의 안개가 걷히며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전개하기 좋아지는 6월 하순이나 7월로 접어드는 시기에 북프랑스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참고로 히틀러는 서부전선의 고위 지휘관들과 달리 영미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것이라 인지했고 소련군의 바그라치온 작전 개시일을 1944년 6월 22로 정확히 찝어내는 예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사실을 예로 당시 독일군이 어떤 수를 썼더라도 바그라치온 작전으로 붕괴되는 전선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르망디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들은 서방총군에 23일 오전에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기습 상륙을 시작했다고고 알려주었다. 서방총군은 통보를 받은 즉시 독일군 사령부에 보고하고 예비대 투입 허가를 기다렸으나 노르망디의 전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B집단군 사령관 롬멜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즉시 휘하에 있던 소수의 기갑 예비대들을 동원해 방어에 나섰다. 


이렇게 급박한 노르망디 전선의 상황과 달리 서방총군에서는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륙 확인 시 바로 투입되기로 했던 서부기갑집단은 파리 근교에서 부대를 기동했으나 연합군 공군의 폭격 위협으로 주둔지인 파리 근교에서 한참 떨어져 노르망디로 가는 입구 근처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B집단군 사령관은 독일군 사령부에 파 드 칼레에 주둔하고 있던 15군에서 수 개의 보병사단들을 차출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독일군 사령부는 적군이 노르망디 상륙이 확인될 때까지 병력 투입을 기다려 달라는 말만 했다. 롬멜은 상륙에 대응할 수 있는 보병사단들이 칼레 방어에 묶여 있는데다 서부기갑집단 휘하 기갑사단들의 투입도 늦어지면서 노르망디에서 고착 방어를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B집단군은 부족한 전력이나마 쥐어짜 노르망디 내륙 부근에서 형성된 교두보를 중심으로 국지적인 반격을 기도했으나 주2) 이미 도로망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못 쓰게 된 상태였고 독일군은 공병을 동원해 급조한 임시 가교를 통해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다. 서방군은 연합군의 폭격과 침공군과 연계된 근접항공지원전력(ACS, Air-Command support System)에 번번이 노출되어 그 때마다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주3)




노르망디 상륙 이후의 독일 서방군



B집단군은 상륙 초기에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상륙 지점에 있던 모든 주둔 병력들을 1파로 투입하고 2선에는 예비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서방군은 지휘 계통의 혼선, 제공권 열세와 병력수 부족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연합군을 초반에 상륙 지점에서 밀어내지 못하였다. 상륙 이후 사흘간 상륙 지점에서 치열했던 양군의 전투가 끝나갈 무렵 서방군은 남은 소규모 부대들을 규합해 노르망디에 최후의 역습을 감행했으나 이 역시도 희생자만 남기고 끝나버렸다.


서방군은 이처럼 연합군 상륙을 저지하는 것과 연합군 공군의 폭격 위협 두 가지에서 전선 대응책을 잃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유럽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련군의 하계공세 여파가 서방총군에 상세하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적군이 언제 베를린에 도달할 수 있는가로 스멀스멀 논지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또한 바그라치온 작전을 맞아 소련전선의 급박한 상황과 이로 인한 중부집단군 전선 재건(최소 480000명)에 필요한 병력까지 독일 서방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노르망디에서 상륙 이후 사흘간 치열했던 전투에도 상륙 저지에 실패한 서방군은 다음 작전으로 최소 여름 전역이 끝날 때까지 연합군을 노르망디에 묶어두고 소수의 부대를 이용해 방어를 펼치는 중간에 예비대를 투입해 이 교두보를 양단하겠다는 회심의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4)




■ 주석(Comment)



주1) 원 2차대전사 - 수송차단 작전.


주2) 원 2차대전사 - 칼날 작전. 성준씨의 꼬인 2차대전사에서는 롬멜이 주도했던 이 작전이 제한적으로 성공했으나

      서부최고지휘관 룬트슈테트 장군이 노르망디 방어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중지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3) 원 2차대전사 - 출처 : Scorched earth.


주4)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 연재물 : 히틀러의 또 다른 실패, 모르탱 공세 편 참조. 요약하면, 모르탱 공세는 영미연합군이 그해 7월까지 개시한 일련의 역공세로 양익이 약해진 상태에서 실시되었고 이러한 반격은 노르망디에서 전선 유지의 실낱 같은 가능성마저 엷어지게 만들었다. 가상 2차대전사에서는 국지적인 반격인 모르탱 공세를 8월 5일 개시하였으나 이러한 이유로 이후 예정되어 있었던 노르망디를 역포위하는 작전을 취소하고 8월 10일짜로 세느강 남쪽으로 B집단군 전체가 퇴각하게 된다. 관련 링크는 http://blog.daum.net/byzantine1988/3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