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일자
[기사 전문]
1987년 12월8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백악관에서 군축 역사의 기념비적 합의문에 서명했다. 사거리 500~5500㎞의 지상발사 탄도·순항미사일을 생산·보유·실험하지 않기로 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다. 냉전 종식의 신호탄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1991년까지 모두 2700기의 미사일이 폐기됐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는 이 조약을 승계했다.
‘핵군축의 골드스탠더드’라는 평가와 함께 가장 성공적 핵군축 사례로 꼽히던 INF가 2일(현지시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미국은 지난 2월2일 국무부 성명을 통해 INF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도 같은 날 즉각 탈퇴 선언으로 맞받았다. 그리고 6개월의 유예기간이 종료되는 이날부터 ‘포스트 INF’ 시대가 열린다. 31년간 이 조약이 유지되는 동안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INF가 결국 ‘미국 최우선주의’를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종말을 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INF 폐기를 지론으로 내세워온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 영향도 컸다.
INF 폐기로 양대 핵강국 미·러 간 군비통제 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이미 2002년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이 폐기됐고 2007년에는 유럽재래식전력감축조약(CFE)이 러시아의 탈퇴로 무력화됐다. 1996년 9월 유엔총회에서 결의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은 핵심 8개국의 비준을 받지 못해 지금까지 발효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만료되는 미·러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도 연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INF 폐기는 핵통제 체제 약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이 INF를 폐기한 것은 러시아와의 갈등 때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견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러가 INF에 묶여 있는 동안 중국은 장외에서 마음껏 중거리미사일 능력을 확대했다. 그중 대부분이 동아시아의 미군 전력이 중국 주변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배치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우리만 조약을 지키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직접 중국을 겨냥했다.
문제는 INF 파기 이후 미국이 중국의 중거리미사일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미국은 중국을 포함하는 새로운 조약을 지향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정말로 미국이 ‘보다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중거리미사일을 포함하는 새로운 군축 메커니즘을 원한다면 이런 식으로 INF를 깨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축은 적과의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아 합의에 이르는 힘든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개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국제 통제체제가 되려면 중국 외에 중거리미사일 전력을 가진 나라들을 모두 포함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제기구를 통한 공개적인 토론과 협의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중국과 양자 간 군축 협상을 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중국의 20배다. 핵전력이 열세인 중국은 비선제공격과 최소억제 원칙의 핵전략을 갖고 있으며 지상발사 중거리미사일은 중국 핵전력의 근간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이 중거리미사일을 만들지 않으니 중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 간의 군축은 서로 똑같은 무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수준에서 서로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를 제거하는 조치를 교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하다.
트럼프는 냉전 시대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에 새로운 중거리미사일을 집중배치하고 중국을 굴복시키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 동북아에서 중국·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군비경쟁이 불가피하다. 미국은 한국에 미사일 기지나 탐지 레이더 등 MD 체계를 두려 할 가능성이 있다. 동북아에 냉전구도가 다시 펼쳐지는데 ‘한반도 냉전 해체 작업’이 제대로 될 리 없으므로 북핵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동북아 군비경쟁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중·러가 한반도 주변에서 합동초계비행을 하고 북한이 INF 위반 논란을 촉발시킨 ‘이스칸데르’급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고 있는 것은 그 전조일지도 모른다.
INF 폐기는 장차 한국의 생존과 직결된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다.
‘포스트 INF 시대’에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비 전략이 현시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12042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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