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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스와 시각-정의길] 외세 압박할수록 뭉치는 국민, 터키 ‘지정학적 몸값’ 높였다

Jacob, Kim 2019. 11. 29. 02:02







2019년 11월 26일자





[칼럼 전문]





큰소리치는 터키-눈치보는 미국 왜?





25일 터키 수도 앙카라 인근 무르테드 공군기지에서는 최근 터키가 러시아로부터 도입한 S-400 방공망 성능 실험이 실시됐다. 이 실험에서 러시아 방공망의 레이더와 미사일의 성능 실험 대상은 미국제 F-16 전투기가 동원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회원국이 이 기구가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러시아 방공망을 가지고 우방국의 전투기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과 나토 회원국으로서는 경악할만한 일이다.

최근 미국과 터키의 관계는 상징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지구촌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동맹 체제를 민낯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는 거침없는 대미 독자 행보를 취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최대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지만, 러시아제 방공미사일을 수입한다. 미국의 대이슬람국가(IS) 격퇴전의 동맹인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공격도 감행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터키에 대한 압박 대신에 최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달래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터키는 큰소리를 치고 미국은 눈치를 본다. 동맹국의 정권교체까지 좌지우지하던,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기존 동맹 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한 풍경이다. 냉전 종식 이후 다극화되는 국제질서, 미국의 동맹국들에 대한 비용 분담 증대 요구와 이에 따른 구속력 약화, 특히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동맹관계에 대한 폄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이에 더해 터키는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와 국내의 점증하는 민족주의를 활용해 대미 독자 행보의 공간을 넓히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올림




미-터키 관계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소련 봉쇄망 구축 과정에서 형성된 대표적 관계다. 미국은 터키를 소련 봉쇄의 첨병으로 내세웠고, 터키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련의 위협을 막으며 친서방 세속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소련 봉쇄를 천명한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도 2차대전 직후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소련의 직접적 위협이 계기였다.

유럽~중동~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에 자리 잡은 터키는 소련 봉쇄뿐 아니라 중동 전역과 지중해 동단을 통제하는 지정학적 입지를 지니고 있다. 터키와 러시아는 200년간에 걸쳐 보스포루스 해협 등 흑해 연안을 놓고 전쟁을 벌인 숙적 관계였다. 터키는 이런 지정학적 입지와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에 비유럽 국가로는 유일하게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나토 안에서 터키는 미국 다음으로 최대 지상군 병력을 제공하며 나토 방위망의 남단을 책임졌다.

냉전 때 미-소의 핵전쟁 발발 전야까지 치달았던 쿠바 미사일 위기에도 터키가 관련됐다. 미국이 터키에 소련을 겨냥한 주피터 미사일을 배치하자 소련도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며 대응한 것이다. 쿠바 위기의 해소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 배치를 철회한 이유도 있지만, 미국도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동의 적’ 소련이 만들어준 공생관계

냉전 붕괴·쿠르드족 문제로 균열 시작

터키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비협조

터키 유럽연합 가입 불허되면서 파탄



2016년 쿠데타군 미군기지 이용에

에르도안, 대미 불신 증폭

러시아 방공망 도입으로 이어져

트럼프, 동맹 폄하·경제제재 가속화

반미 확산시켜 되레 정부지지 결집

쿠르드 공격 허용 등 달래 보지만

미국 영향권 이탈 행보에 속수무책



미-터키 동맹의 상징은 터키의 인지를리크 공군기지다. 미국이 1954년부터 무제한으로 이용한 인지를리크 기지는 중동으로 전개되는 미 군사력의 발판이자 미 핵무기 저장소다. 이슬람이 여전히 지배적 계율인 중동의 다른 국가와 달리 가장 강력한 세속주의 체제를 가진 터키만이 미군 기지 제공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현대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는 터키의 이슬람 체제를 혁파하고 강력한 세속주의 체제를 세웠고, 군부는 이를 지키는 수호대였다. 터키 군부는 수차례의 쿠데타를 통해 세속주의 체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권위주의 정부를 유지해왔다. 미국은 그 든든한 후원자였다.

미-터키 관계의 균열은 ‘공동의 적’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찾아왔다. 소련 붕괴 직후인 1991년 걸프전 때 미국은 인지를리크 기지에서 공군력을 전개하고, 터키 국경을 통해 이라크 북부로 진군하기 위해 터키의 참여를 독려했다. 하지만 터키는 거부했다. 미국이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을 봉기시켜 반후세인 항쟁에 동원하려 하자 터키의 최대 안보 우려인 자국 내 쿠르드족 독립을 자극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쿠르드족 문제는 양국 관계를 균열시키는 최대 요인이 됐다.

2003년 3월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의 에르도안이 집권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곧 벌어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에르도안은 터키를 통한 미 육군 병력의 이라크 침공을 불허했다. 터키가 열망하던 유럽연합(EU) 가입이 2000년대 들어 완전히 좌절된 점도 터키와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를 파탄시킨 요인이었다.

아랍의 봄이 발발한 2010년 이후 중동의 국제 정세도 에르도안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이집트의 민선 대통령이자 이슬람주의자인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정권이 무너졌다. 군부를 중심으로 터키 국내에서 커지는 정치적 저항은 에르도안을 이슬람주의에 바탕을 둔 터키 민족주의로 더욱 기울게 했다. 2013년 이스탄불에서 민주화 시위가 터져 나오자 에르도안은 서방의 개입을 의심했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펫훌라흐 귈렌이 서방의 영향력을 터키로 유입시키는 통로라고 봤다.

2014년 6월 시리아와 이라크에 전격적으로 선포된 이슬람국가 출현과 그에 이은 미국의 대이슬람국가 전쟁은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의 오랜 우려를 다시 부추겼다. 미국이 시리아 지역의 쿠르드족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를 중심으로 시리아민주군(SDF)을 결성해 이슬람국가 격퇴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터키는 인민수비대를 자국 내 쿠르드족 무장독립투쟁 세력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산하 조직으로 봤다. 미국으로서는 이슬람국가에 대항할 지상 전력을 갖춘 나라는 터키뿐이었다. 하지만 터키가 이슬람국가 성장을 오히려 방조하는 듯하자 미국은 쿠르드족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터키는 대이슬람국가 전쟁에서 미국의 인지를리크 기지 사용을 제한했다.

2016년 7월 터키에서 군부 쿠데타가 기도됐다. 미국 등 서방이 쿠데타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르도안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쿠데타를 진압한 에르도안은 귈렌이 그 배후라고 규정했고, 미국에 거주하는 그의 송환을 요구했다. 미국은 증거가 없다고 거부했다.

에르도안의 대미 불신은 쿠데타 때 인지를리크 기지에서 F-16 전투기가 발진해 자신의 대통령 별장을 공격하려 한 사건으로 증폭됐다. 미국의 개입 없이는 F-16 전투기 발진이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에르도안이 러시아제 방공망인 S-400 도입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다.

에르도안에게 개인적 호감을 갖고 있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도 양국 관계를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귈렌의 송환이 관철되지 않자 2017년 터키 내 미국 전도사 앤드루 브런슨을 테러 혐의로 체포했다. 트럼프 정부의 경제제재와 터키 리라화 폭락에도 에르도안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국내 지지세력은 더욱 결집됐다.

올해 하반기에 터키의 러시아 방공망 도입이 현실화되자 설마 하던 미국의 조야는 경악했다. 터키는 러시아와 방공망과 전투기 기술 이전까지 합의했다. 나토의 방어망에 구멍을 낼 뿐 아니라 터키가 미국의 군사적 영향권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조처들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는 급속히 유화적으로 바뀌었다. 트럼프는 지난 10월6일 에르도안과 통화를 하고 난 뒤 시리아에서 미군 철군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시리아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작전을 천명한 에르도안에 대해 “바보가 되지 말라”고 경고했던 트럼프는 지난 13일 에르도안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나는 당신의 빅 팬”이라고 달랬다. 그런데도 에르도안은 미국이 요구하는 러시아 방공망 도입 철회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터키는 S-400 방공망의 성능 실험에서 미국제 F-16 전투기 동원해, 미국을 경악하게 했다.

2017년 퓨리서치센터 조사를 보면, 터키 국민의 79%가 미국에 부정적 견해를 지니고 있고 82%는 트럼프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다. 에르도안이 미국에 큰소리를 치는 배경이다. 이는 미국의 일방적인 동맹 정책, 특히 냉전 붕괴 이후 초점을 잃어버린 미국의 중동정책의 산물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올림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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