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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북리뷰>日 역사에 내재된 차별이 ‘혐한’ 불렀다 - 민영TV 군사해설가 김 상우

Jacob, Kim 2020. 1. 13. 00:14








2019년 12월 5일자





[기사 전문]








혐한의 계보 / 노윤선 지음/글항아리

고대 28종 불가촉 천민 존재

제도·관습·언어 등으로 옥좨

혐오 통해 국가 정체성 구축

근대화된 후엔 北核이 타깃돼

美 ‘재팬패싱’ 등 외부요인 탓

혐오의 주된 대상 ‘한국’으로





“삶아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

‘먹방’ 출연자가 식재료를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며 한 말이 아니다. 지난 2월 TV아사히 정치 대담쇼 ‘비토 다케시의 TV태클’에 출연한 일본의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72)가 문희상 국회의장을 가리켜 발언한 내용이다. 기타노는 일본 내에서 전설적인 코미디언일 뿐만 아니라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TV아사히는 일본 수도권 민영방송 5개사 중에서 가장 높은 영향력을 자랑하는 방송사다. 유명인사가 이웃 나라 입법부 수장을 조롱하는 발언이 그대로 공중파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방송되는 일은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점에는 혐한도서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고, 혐한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음식점 출입구엔 한국 관광객 출입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국에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왜 일본에선 버젓이 벌어지는 걸까. 역사적으로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자인 한국에 사죄하지 않고 혐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선 혐한에 관해 주로 문화적·역사적 측면에서 연구와 논의가 이어져 왔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혐한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여기에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측면을 함께 살피는 시도를 한다. 저자는 최근 일본에서 부는 혐한 열풍과 혐한을 반성하는 움직임을 돌아보고 일본의 교수·언론인·지식인·정치인의 담화를 분석해 혐한이 이뤄진 과정을 따라간다.

저자는 일본 내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혐한을 이해할 수 없다며 먼저 피차별 부락민 1000년 역사를 살핀다. 일본에는 고대부터 ‘에타’ ‘히닌’ ‘이카이’ ‘에토리’ 등 28종에 달하는 불가촉천민이 존재했다. 일본은 이들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다양한 사회제도와 언어 관습으로 옥죄었다. 일본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혐오를 이용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2000년대 이후 보이는 혐한 담론에서 ‘불결하다’ ‘저능하다’ ‘추하다’ ‘범죄가 많다’ 등의 생물학적 인종주의가 보이는 이유도 그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근대화 이후 신분제도가 사라진 뒤 일본은 바깥에서 적을 찾았다. 공산주의 국가이자 핵 위협을 가하는 북한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일본의 가장 큰 외부의 적이었다. 일본의 역대 정부는 북한 위협론을 통해 내부 단속을 하며 결속해왔다.

외부의 적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때는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우경화 노선을 걸으며 재무장을 준비하는 아베 신조 행정부에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감 유지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북·미 대화, 남북 대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면서 큰형 노릇을 해왔던 미국으로부터 ‘재팬 패싱’을 당하는 일이 잦아졌다. 철강·조선·전자 등 과거 일본의 주력 산업 경쟁력은 한국에 따라잡혔고, 한류도 일본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한국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강제 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 강제동원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과 맞물려 혐오의 주된 대상이 한국으로 바뀌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혐한의 역사적 배경을 살핀 저자는 현재 혐한의 주류 담론화 현상 뒤에 숨은 일본 사회의 진실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야마노 샤린의 ‘만화 혐한류’, 노사카 아키유키의 소설 ‘반딧불이의 무덤’, 일본계 미국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소설 ‘요코 이야기’, 햐쿠타 나오키의 소설 ‘해적이라 불린 사나이’ ‘영원한 제로’ 등 혐한 관련 베스트셀러에 담긴 진의를 들춰낸다. 저자는 이들 작품이 가족애를 강조하면서 전쟁 가해 책임을 희석했으며, 패전 후 가라앉은 일본인의 자긍심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이들 작품이 널리 읽히는 현상 자체가 가족애와 결합한 애국정신의 전형적인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혐한 여론을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미디어다. 지난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한·일 관계가 악화하자 일본 공중파 매체는 혐한을 소재로 자극적인 방송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침이나 저녁의 황금시간대에 양국 간 경제전쟁 관련 특집 프로그램이 대대적으로 전파를 탔다. 한국에 비판적이며 일본에 유리한 말을 해주는 이들이 패널로 등장해 주관적 편견, 잘못된 역사 인식, 의도적인 폄하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혐한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9년은 일본 내 혐한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센 해였다. 일부 ‘넷우익’(일본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극우 성향 사용자)을 중심으로 한 혐한 현상은 이제 미디어의 주류가 됨과 동시에 정부 주도의 혐한 성격도 띠고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조건부로 동결되고 한·일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커졌지만, 깊어진 갈등의 골은 당분간 회복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하지만 양국이 경제와 안보 면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만큼, 관계 악화를 무작정 두고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고립은 필패다. 내수시장에 만족하며 국제 표준 및 규격을 소홀히 한 탓에 ‘갈라파고스화’를 겪으며 경쟁력이 떨어진 일본의 주요 산업이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승기를 잡는 쪽은 언제나 상대방을 잘 아는 쪽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역사를 통해 혐오와 맞설 대안이 혐오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아님을 배웠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지혜는 상대방을 잘 파악하는 데에서 나온다. 우리가 혐한의 근원을 알아야 할 이유다. 304쪽, 1만50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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