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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스와 시각-정의길] 40여년 전 미국이 싹틔운 갈등, 트럼프가 다시 불지펴

Jacob, Kim 2020. 1. 22. 00:34








2020년 1월 10일자





[칼럼 전문]




[토요판] 뉴스분석, 왜?

미-이란 분쟁의 뿌리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친미에서 반미국가로 변신
미국, 이후 이란 봉쇄 매달려
걸프전쟁, 알카에다, IS 등은
미-이란 적대적 대립의 산물

이란과 화해한 오바마 정책을
트럼프가 일방 파기해 재갈등
군사령관 폭살로 전면 대립





▶ 미국이 이란 혁명수비대의 사령관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무인항공기로 공격해 폭사시키면서 중동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란은 지난 8일 첫번째 보복조처로 이라크의 미군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미국은 일단 즉각적인 반격은 자제했지만, 이란의 주요 시설에 대한 추가 보복공격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어 상황에 따라서는 확전 가능성도 크다. 두 나라 갈등의 기원을 살펴본다.

미국의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암살로 중동에 드리운 전운의 뿌리를 파헤치려면, 우리는 시계를 41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혁명은 중동의 지정학을 일거에 바꾸며, 그 뒤 중동분쟁의 뿌리가 되어, 현재 솔레이마니 암살까지 치달아왔다.


이란의 이슬람혁명 전야인 1978년부터 중동에서는 중대한 두가지 흐름이 교차되고 있었다. 이때까지 중동분쟁의 대명사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의 분쟁이 중대한 변곡점에 들어섰다. 1978년 9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 대통령의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이 체결될 때 이란에서는 광범위한 반체제 운동이 터져 나왔다. 이란의 반정부 시위는 1979년 1월16일 팔레비 국왕이 이란을 떠나 망명하는 이슬람혁명의 시작으로 귀결됐다. 또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3월에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두 사건은 중동분쟁에서 팔레스타인 분쟁을 희석시키고, 이란발 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미, 이라크 후세인을 처음엔 지지



이란에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이슬람혁명 강경파들은 그해 11월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을 인질로 잡았다. 444일간이나 계속된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사건은 이슬람혁명이 가져온 중동의 지정학적 격변을 화끈하게 보여줬다. 전후 중동에서 이란은 미국의 최대 동맹국이었다. 세계의 에너지인 중동 석유가 수출되는 페르시아만의 안보를 미국은 이란에 기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당시 독재와 부패에 찌든 이란의 팔레비 국왕을 후원했다. 이란의 인구나 국토, 기술력, 군사력은 중동에서 최고였고, 중동의 다른 나라와 달리 세속주의였다. 미국은 이란에 대규모 미군을 주둔시키지는 않았으나, 접경한 소련을 견제하는 군사시설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런 이란이 중동에서 최대의 반미 국가로 일거에 선회한 것이다. 이에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카터 당시 대통령은 1980년 1월 연두교서에서 페르시아만에서 미국의 이익에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다. 카터 독트린은 그 이후 미국의 대중동 전략의 주축이 됐다. 카터 독트린은 사실상 이란 봉쇄가 핵심이었고, 미국은 이란으로 대표되는 반미세력 봉쇄와 타도를 위해 군사력을 상주시키며 그 사용도 불사해왔다. 이는 중동분쟁의 방아쇠가 됐다.

그 이전까지 중동에서 미국은 역내 국가들의 세력균형을 유지시키며 이익을 도모하는 역외균형자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이란이라는 나라가 있어서 가능했는데, 이란이 반미 국가로 바뀌고 이슬람 혁명 이데올로기를 수출하자 직접 개입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란 봉쇄는 카터 독트린이 발표된 그해 9월22일 그 모습이 드러났다. 페르시아만을 두고 이란과 오랫동안 역내 패권을 다투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전격적으로 이란을 침공했다. 수니파 후세인은 이란 시아파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이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로 수출되는 것을 우려했다. 배후에는 이슬람혁명 수출을 우려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 수니파 보수 왕정국가, 그리고 미국이 있었다.

전쟁 상황이 이라크에 불리해지자, 미국이 나섰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2년 3월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에 지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다.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고,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통해 무기를 제공했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특사로 파견돼, 후세인을 직접 만났다. 럼스펠드는 20년 뒤인 2003년 국방장관으로서 이라크를 침략하는 주역이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 8월까지 지속돼, 전후 최장기 재래식 전쟁으로 남았다. 모두 125만명이 죽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는 사실상 패배했고, 이란의 혁명은 더욱 공고해졌다.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 등에서 빌린 전비로 빚더미에 올랐다. 후세인은 자신이 반혁명 총대를 메고 이란과 전쟁을 벌였는데, 그 수혜자들인 쿠웨이트와 사우디 등은 빚 독촉만 하는 데에 분개했다. 후세인은 석유채굴 분쟁을 하며 쿠웨이트를 협박하다 1990년 8월2일 전격적으로 침공해 점령했다.

당시 소련이 붕괴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냉전 이후 질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라크가 사우디까지 위협하자, 미국 주도로 35개국의 다국적군이 조직됐다. 다국적군은 1991년 2월24일 쿠웨이트 탈환에 나서는 ‘사막의 폭풍’ 작전을 전개해, 100시간 만인 28일 쿠웨이트를 탈환했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인근 240㎞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이 걸프전에서 후세인 정권 붕괴를 시도하지 않았다. 대안이 없어서였다. 이란을 견제하는 후세인 정권의 역할도 고려했다. 대신에 미국은 이란과 이라크를 이중봉쇄하는 정책으로 바꿨다.

걸프전은 중동을 산산이 분열시켰다. 당시 아프간 전쟁에서 무자헤딘(소련의 아프간 침략에 맞서 싸운 이슬람 반군)으로 참전했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후세인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개입에 분노했다. 특히, 미군이 성지인 사우디에 주둔한 것은 이슬람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이가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하고 사우디로 돌아온 빈라덴은 미군의 사우디 주둔에 분노했다. 그는 사우디 왕실과 국방부를 찾아가, 무슬림 스스로가 성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축당했다. 사우디 정부는 그를 위험한 이슬람주의자로 낙인찍고 추방했다. 이미 아프간에서 알카에다를 결성했던 빈라덴은 그 후 수단과 아프간을 전전하며, 미국을 상대로 한 성전을 조직했다. 이는 10년 뒤인 2001년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귀결됐다.

9·11테러가 발발하자, 미국은 알카에다보다도 후세인 정권 타도를 먼저 생각했다. 그 기회에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수립해, 중동에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전파하면 이란까지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정보를 조작하면서까지 미국은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 미국의 침공에 후세인 정권은 두달도 안 돼 붕괴됐으나, 이라크 전쟁은 그때부터 사실상 시작됐다.

후세인 정권을 떠받치던 수니파 군부와 관료들이 도망다니던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과 결합해, 강력한 반미 게릴라 세력을 형성했다. 후세인 정권 타도 뒤 대안세력이 될 수밖에 없던 시아파 세력도 반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란은 이라크 전쟁에 개입해, 시아파 민병대들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우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았다.


호르무즈 긴장 부른 트럼프의 역주행



이라크 전쟁이 수렁에 빠진 2010년 12월 ‘아랍의 봄’으로 시리아에서는 2011년부터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과 사우디는 반미 세력인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정권 제거에 나서 반군을 지원했으나, 그 지원은 이슬람주의 세력인 이슬람국가(IS)의 탄생만 낳았다. 이슬람주의 세력을 막고 중동에서 세력균형의 추 구실을 하던 아사드 정권 약화가 초래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이슬람국가와 맞서 싸울 주력이 없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이슬람국가가 더 위급한 적임을 뒤늦게 깨닫고,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무장시킨 시리아민주군(SDF)을 조직해 이슬람국가 격퇴에 나섰다. 또 오바마 행정부는 카터 독트린 이후 미국의 이란 봉쇄가 효과는 없이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만 증대시켰다고 판단하고, 이란과의 화해에 나섰다. 그 결과가 2015년 이란이 미국 등 국제사회와 맺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이라는 핵협정이다. 이 협정으로 미국 등 국제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철회하고, 이란의 핵개발 제한을 얻어냈다. 이로써 오랜 이란 봉쇄가 풀리는 듯했다. 이란도 이라크 내의 시아파 민병대에 대한 영향력을 동원해 이슬람국가 격퇴전에 협조했다. 그 주역이 이번에 암살당한 솔레이마니다.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중동전략을 다시 뒤집었다. 중동전쟁 종식과 미국 군사력 개입 철수를 내걸었던 트럼프는 취임하자 그 핵심인 이란 봉쇄를 다시 강화하는 모순적 조처를 취했다. 취임 이후 첫 해외순방을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들로 선택해, 대이란 동맹을 결성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등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사우디·이스라엘이 주축이 된 반이란 동맹의 결성이었다. 그리고, 2018년 5월 미국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뒤 이란에 대한 강화된 제재를 재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미 중동 전역에서 헤즈볼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이라크 내의 시아파 민병대 등 친이란 대리세력을 통해 영향력을 증대한 이란은 반격에 나섰다. 러시아와 중국의 중동 진출을 도우면서,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정권을 회생시키고, 이라크에서는 시아파 민병대 등을 동원한 저강도 전쟁을 벌이고, 예멘 내전에서는 시아파 후티 반군을 지원했다. 미국과 그 동맹국인 사우디 등의 입지를 중동에서 더욱 위축시켜 나간 것이다.

미국이 이란과의 핵협정에서 탈퇴한 지 1년이 지난 2019년 5월부터는 이란도 그 협정에서의 핵개발 제한 의무를 축소하면서 행동에 나섰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들을 나포하거나 공격했다. 미국의 드론을 격추시키고, 9월에는 사우디의 최대 석유시설인 압카이크 정유시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이 가해져, 전세계 석유시장이 출렁였다. 물론 이란은 이 공격의 책임을 부인했고, 미국 역시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속앓이했다.

지난해 11월부터는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대한 시아파 민병대들의 공격이 잦아졌다. 11차례의 공격 끝에 27일 키르쿠크 미군기지 공격에서 미국 민간인 근무 계약자 1명이 사망하자, 미국은 드디어 보복에 나섰다. 공격 주체인 카타이브 헤즈볼라와 연관된 목표물 5곳을 공습해 25명을 사망시켰다. 이는 지난해 마지막날인 12월31일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에 대한 성난 군중들의 난입 시위를 촉발했고, 미국은 지난 3일 솔레이마니 암살로 응수했다.


미-이란 전쟁 가능성은 낮아



이란혁명 이후 미국의 중동정책은 무슨 결과를 낳았나? 첫 목적이던 이란 영향력 봉쇄는 현재로선 실패했다. 이라크에서 시아파 정부가 들어서고,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는 회생했고, 예멘 내전에서 시아파인 후티 반군은 사우디의 안보를 위협하고, 이란은 미국이 파기한 이란국제핵협정을 놓고 페르시아만의 긴장을 고조시켜, 현재의 전운을 야기했다.

중동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입지가 위축됐다. 중동의 핵심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시리아 및 이라크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증발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과정에서 러시아는 중동으로 귀환했고, 미국을 밀어내고 시리아 내전의 중재역을 자임한다. 미국의 경고에 코웃음 치며 쿠르드족을 공격한 터키의 탈미화는 더 심각한 문제다. 터키-이란-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지는 탈미 벨트는 중국과 러시아 등 미국의 경쟁국들의 중동 및 인근 지역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트럼프와 이란은 결코 전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는 이라크 전쟁의 실패, 이란은 지속되는 제재 때문이다. 전쟁은 없지만, 분쟁은 격화되는 중동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