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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CIA, 암호장비 120국에 팔아 정보 감청했다"

Jacob, Kim 2020. 3. 17. 17:33







2020년 2월 13일자





[기사 전문]





"스위스 회사 크립토 배후는 CIA" WP, 작전 코드명 '루비콘' 폭로

1970년부터 20년 넘게 기밀 빼내 캠프 데이비드 담판 등서 성과

"화웨이 배후는 中" 공격과 배치





1978년 9월, 미국 워싱턴DC 인근 대통령 전용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30년 중동전쟁을 벌인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협상이 미국 중재로 벌어졌다.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메나헴 베긴 총리가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중재로 만난 것이다. 양측은 13일간의 진통 끝에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시나이반도를 돌려주되, 이집트군은 시나이반도에 주둔하지 않는다'는 중동평화안에 합의했다. 미국이 세기의 담판을 해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 국가안보국(NSA)은 사다트 대통령이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참모들과 논의하는 내용을 모두 감청했다. 협상 상대방의 패를 훤히 들여다본 것이다.


이듬해인 1979년, 미국의 우방이었던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발생한 뒤 테헤란의 시민들은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붙잡았다. 이때도 미국은 이란의 속내를 파악하고 인질 석방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 비밀리에 미국과 이란의 협상을 중재했던 알제리의 교신 내용을 모두 빼내 파악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당시 NSA 국장이었던 바비 인만은 "당시 카터 대통령이 이란의 의중에 대해 질문하는 것의 85%는 항상 답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집트와 이란의 정보를 빼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무기는 스위스의 암호 기기 업체 '크립토'였다. 이집트와 이란 모두 크립토가 생산하는 암호 기기를 써서, 미 정보 당국이 교신 내용을 중간에 손쉽게 가로챈 덕분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 독일 공영방송 ZDF는 11일(현지 시각) 기밀 문건을 토대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서독 연방정보원(BND)이 이 회사를 비밀리에 소유해 왔다고 폭로했다. 자신들이 만든 암호 기기를 팔아, 그 암호 기기를 통해 정보를 빼냈다는 것이다.


미 CIA와 서독 BND는 575만달러를 주고 1970년 크립토를 인수했다. 코드명은 '루비콘'. 미·소 냉전기 전체를 통틀어 120개국이 크립토의 기기를 사용했으며, 미국의 감청 대상이 됐다고 한다. 1981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최소 61개국과 유엔이 크립토 제품을 사용했다. 당시 사우디가 이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이었으며 이란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이라크, 리비아, 요르단에 이어 한국이 뒤를 이었다고 WP는 전했다. 크립토와 서방국과의 관계를 의심한 소련, 중국, 북한 정도만 고객 리스트에서 빠져 있다.


CIA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CIA는 공식 보고서에서 "외국 정부들은 (미국과 서독 등) 최소 2개국이 감청할 수 있는 비밀 통신 기기를 사용하는 대가로 미국과 서독에 큰돈을 지불하고 있었던 셈"이라며 "이 작전은 세기의 정보 쿠데타"라고 자화자찬했다. NSA가 수행한 기계 도·감청의 40%, 서독 BND가 만들어내는 외교관계 보고서 90%가 크립토 제품에서 나온 것으로 자체 평가되기도 했다.









미국은 크립토 장비로 빼낸 정보를 바탕으로 거침없는 군사작전도 감행했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당시 독일 서베를린 나이트클럽에서 폭탄 테러로 미군 2명과 터키인 여성 1명이 희생됐다. 사건 10일 뒤 레이건은 보복 공격을 명했고,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 지도자의 딸 등이 사망했다. 이때 레이건은 "리비아가 테러를 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면서 비난했다. 그 증거는 당시 동베를린 주재 리비아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사건 성공' 보고를 감청한 기록이었다. 1982년 포클랜드전쟁 당시엔 아르헨티나군의 정보를 빼내 영국에 넘겨줄 수 있었다.


미국과 서독의 정보 당국은 크립토 장비를 팔기 위해 각국 정부에 뇌물과 성 접대까지 서슴지 않았다. 통일 독일은 1993년 옛 서독이 보유하던 크립토 지분을 1700만달러에 매각했다. CIA는 2018년에야 가지고 있던 크립토 지분을 매각했다.


당시 크립토 작전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의 평은 엇갈린다. 16년간 크립토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한 주에르그 스푀언들리는 "미국이 제3세계 독재자들을 파악하면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이건 올바른 일이 아니더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인만 전 국장은 "거리낄 게 전혀 없다"면서 "당시 감청한 자료는 미국 정책 당국자들에게 중요한 자료였다"고 반박했다.


최근 미국 정부는 중국 통신 장비 기업 화웨이의 장비를 두고 중국 정부가 배후에 있다며 금수 조치를 해왔다. 하지만 자신들이 비난하는 일을 CIA도 과거에 했던 것이다. CIA와 BND는 이번 보도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크립토가 소재한 스위스 정부는 11일 크립토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AP는 보도했다.






[이현택 기자 soolgap@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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