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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위크] [세상의 창] 국공내전과 타산지석 - 정승열 법무사

Jacob, Kim 2020. 4. 15. 00:20







2020년 4월 2일자





[칼럼 기사 전문]





2차 대전 후 형성된 냉전 체제는 미·소 강대국이 약소국가들의 줄 세우기와 마찬가지였다.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도 좌우 이념대립의 혼란을 겪으면서 UN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지만,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3년여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국을 지원하는 UN 참전 16개국과 북한의 지원에 나선 중·소 양국 등 무려 20개국이 비좁은 한반도에서 싸운 국제전쟁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손해에도 불구하고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 국력은 북한 공산당과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국민 통합과 내부 단결력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매우 크다. 오늘날 1인당 GNP 26배(3,678.7만 원/142.8만 원), 무역 53배(1조1400억/401억)의 엄청난 국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안주하는 사이에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북한을 생각하면 크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또 이웃 중국의 국공합작과 국공내전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싶다.


1910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를 멸망시킨 풍운아 쑨원(孫文)은 공산당과의 합작으로 세력확대를 노렸으나, 1925년 쑨원이 병사하자 국민당의 주도권은 장제스에게 넘어갔다. 본래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이 커서 러시아까지 방문했던 장제스는 1926년 수도 난징(南京)에서 열린 국민당 전체 회의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뒤 서구 사상으로 전환했다.


장제스는 독립된 제후처럼 행동하는 군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북벌에 나섰는데, 1927년 4월 12일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벌임으로써 1차 국공합작은 끝났다. 1928년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중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과 국공내전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결국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게 대륙을 빼앗기고 조그만 섬 대만으로 쫓겨간 신세가 되었다.


먼저, 1927년 장제스가 상해 쿠데타로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시작된 1차 내전은 1936년까지 계속했다. 국민당군은 공산당을 포위 공격했지만,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항일 투쟁을 위한 2차 국공합작을 맺었다. 즉, 만주에 일본의 괴뢰국이 수립되자 장제스는 일제 격퇴와 공산당 격퇴라는 두 가지 문제로 부딪히게 되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만주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사건(西安事件)으로 2차 국공합작을 맺게 된 것이다. 1937년 7월 일본은 북경 교외에서 노구교(蘆溝橋)사건을 벌이는 한편, 남부 항저우를 기습 상륙하여 국민당 정부의 남경을 점령하고 대학살을 벌였다. 장제스는 중칭(重慶)으로 피난하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마지막 3차 내전은 일본이 항복한 이후인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루어졌다. 즉, 1945년 일본의 패배로 종전될 가능성이 커지자, 국민당은 종전 후에 정권의 주도권을 원했지만 공산당은 연합정부 형태를 원했다. 양당의 갈등은 일본의 항복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 문제를 둘러싸고 고조되었다. 1945년 8월 10일, 공산당의 주더(朱德)가 일본군과 만주국에 대한 무장해제를 지시하자, 공산당 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국민당은 일본과 만주국에 공산당의 지시를 따르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더가 무장해제를 강행하고, 일본이 국민당의 요구에 응하자 공산당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내전 중단과 평화 통일을 바라는 여론에 1945년 8월 28일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국민당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에서 회담했다. 충칭 회담에는 저우언라이와 주중 미국대사도 참석했다. 회담 후 양 당은 내전을 피하고 국민당의 주도적 위치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골자인 쌍십협정(雙十協定)에 서명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산당의 병력 128만 명과 비교할 때 430만 명으로 월등한 병력과 미국의 강력한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내전 중지와 통일정권 수립 합의에 노력하는 척하면서도 공산당 섬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중순, 국민당이 공산당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다시 고조되자 미국이 조정자로 나섰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을 특사로 파견하여 1946년 1월 10일에 마셜의 중재 아래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정전협정이 이루어졌지만, 그해 3월 국민당은 또다시 협정을 파기하고 소련이 철수한 만주 지역, 즉 동북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이곳에서 해방구를 조직하려고 있던 공산당은 정전협정 위반을 주장하며 무력으로 대응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마셜은 정전 명령을 내렸지만, 효과가 없었다.


1946년 6월 26일 국민당의 장제스는 160만 명의 군대에 공산당 통치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 초기에 전세는 국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여 1947년 3월 항일 투쟁 때부터 공산당의 수도 역할을 해온 산시성의 옌안(延安)을 점령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공산당 전멸을 하려고 한 국민당이 도시만 집중적으로 점령에 나서는 사이에 수많은 농촌 지역을 소홀히 하여 더 많은 지역을 빼앗기게 되었다.


게다가 과도한 징병과 징세로 민심을 흉흉하게 했고, 또 전비 충당을 위해 남발된 통화는 물가 폭등을 일으켰다. 반면에 수적으로 열세인 공산당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민심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들이 지배하는 해방구의 농민들과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결국,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인 실패와 부패에 국민은 국민당을 버리고 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47년 공산당은 역공세에 나서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류보청과 천이의 군대는 산시성, 산둥성을 장악하고 허베이와 양쯔강 하류로 진격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치른 회해 전투에서 공산당이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1949년 1월 15일에는 톈진을 함락하고, 1월 31일에는 베이징에 입성했다. 1949년 패배를 거듭하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게 화의를 제안했다.


국민당 정부가 장제스를 하야시키고 부총통인 리쭝런(李宗仁)을 총통으로 내세운 안을 제안하였으나, 마오쩌둥은 8개 항의 평화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장제스를 포함한 전범자 처벌,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군대 재편성,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 매국 조약 파기, 반동분자가 없는 정치협상회의 개최, 민주 연합정부 수립, 국민당 정부와 각급 기구의 모든 권력 접수 등으로 사실상 국민당 정부의 해체를 요구한 것이었으므로 화의는 결렬되었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양쯔강을 건너 국민당 정부의 난징을 함락하고, 5월 27일 상하이, 10월 14일 광저우, 11월 30일 충칭, 12월 27일에는 청두(成都)를 점령했다.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광저우, 충칭, 다시 청두로 수도를 옮기다가 1949년 12월, 끝내 타이완으로 패주했다. 이로써 중국에서 국민당의 통치는 막을 내렸고, 공산당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쑨원의 삼민주의는 대만 정부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 중국 정부는 삼민주의를 계승하면서 건국기념일에는 천안문광장에 그의 초상화를 커다랗게 내걸고 있다.






[정승열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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