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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서독은 동독 이탈민 수백만 명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Jacob, Kim 2019. 4. 11. 23:03







2019년 4월 4일자





체제를 넘나든 사람들 이야기 '동독민 이주사'





[기사 전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종전 이후 영토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사분됐다.

이 가운데 소련이 점유한 땅은 사회주의 체제를 받아들여 동독이 됐고, 나머지 지역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인 서독이 됐다. 동독 안에 있는 대도시 베를린도 동서로 나뉘었다.

서독과 동독은 서로 대립했으나, 주민 왕래가 완전히 봉쇄되지는 않았다. 서독 주민등록사무소 통계에 따르면 1950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1989년 사이에 동독에서 넘어온 주민은 456만6천여 명에 달했다. 남한에 온 북한 주민이 3만여 명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수치다.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최승완 박사는 신간 '동독민 이주사'에서 동독과 서독 주민이 양국을 오간 양상과 서독이 동독인 수백만 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를 분석한다.

1950년대 동독과 서독 사이의 주된 이주 통로는 베를린이었다. 동서 베를린에 지하철과 전철이 운행됐고, 일일 방문도 가능했다.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사람이 연평균 30만명에 이르자 동독은 결국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에도 땅굴을 파거나 중개인의 도움을 받아 서독행을 감행하는 동독인이 적지 않았다.

저자는 다양한 통계를 조사해 서독으로 간 동독인의 신상을 재구성했다. 그는 "동독 이탈민 다수는 젊은 세대였고, 고도의 전문직은 아니어도 생산 분야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하는 숙련된 인력이었다"고 설명한다.

젊고 능력을 갖춘 노동력 유입은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이 사실은 동독 이탈 주민이 서독에 잘 정착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저자는 "대규모 탈동독 행렬과 서독 경제의 폭발적 확장이 병행된 것은 이탈 주민과 서독 사회에 모두 행운이었다"며 "경제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동독 이탈 주민은 서독에서 큰 사회적 마찰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어 "서독은 역사적 전통과 언어가 동일한 동독 사람들에게 같은 국적을 부여하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정착 지원에 따른 논란의 소지를 차단했다"며 "이탈 주민 문제를 서독 연방정부가 전담하지 않고 주정부, 종교 단체와 유기적으로 협조해 해결한 것도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서독에 왔다가 적응하지 못해 동독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거론한 뒤 "동독에 사는 가족과 편지, 소포, 상호 방문으로 교류한 이탈 주민들이 독일 소통의 매개체가 됐다"고 평가한다.

동독과 서독 역사는 냉전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진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저자는 "우리는 북한 이탈 주민을 위해 물질적인 면을 넘어 더욱 적극적인 사회 통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분단국 이탈 주민이 분단의 벽을 허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염두에 두고 그들의 잠재력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서해문집. 564쪽. 3만2천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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