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1945/독일-폴란드 분리선

◆[톱데일리] 2018년 7월 7일 톱데일리 기사 외

Jacob, Kim 2018. 7. 8. 03:51






- 기사 출처 -




링크 주소1: [톱데일리] 일본 폭우피해 잇따라, 누적 강수량 1m 넘다… 4명 사망·52만명 대피령




링크 주소2: [남도일보] 일본 폭우, 7호 태풍 쁘라삐룬 영향 폭우...8호 태풍 마리아 다가온다





가상 2차대전사(11) 소련군, 중앙 돌파 개시(계속)




백러시아 전역 1차 공세(6.18~22일) 이후 벌어진 민스크 탈환(24일)까지 소련군은 공세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다. 특히 6월 23일은 중앙군에게 실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한 때 중앙군은 집단군 좌익에 있는 3기갑군과 4군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으나 양 군은 소련군에게 포위될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가며 방어선 서쪽으로 퇴각전을 이어나갔다. 


6월 26일에 들면서 잠시 주춤했던 소련군 공세는 29일에 북방군과 중앙군 전선의 연결고리를 끊어놓기 위한 공세로 재개되었다. 전투는 다음 날(30일)까지 계속되었고 공세 개시 이래 약 2주에 달하는 시간에 중앙군은 소련군에게 역으로 포위 섬멸될 위기에서 분전하며 민스크 서쪽에서 전선을 고착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소련군, 백러시아 전역 2차 공세 펼치다




남쪽에서는 7월 5일에 다시금 중앙군 전선부터 남부전선에 이르는 연결고리에서 소련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되었다. 남부집단군은 공세 개시 2일 만에 남부전선에서 다시금 거대한 포위 위협에 직면했음을 알아채고 소련군 공세 측면에 몇 차례 지엽적인 역습을 감행했으나 잠시 소련군 공세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했을 뿐 위협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이 공세에서 아직 전략예비로 모스크바 중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예비대를 투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백러시아 전역에서 예비대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소련군은 민스크 서쪽에서 중앙군을 다시 포위하겠다는 목표로 공세를 펼쳤다. 중앙군은 5일 하룻 동안 이 공세로 8000명을 사망 4000명, 실종 4000명으로 손실했다. 독일군은 전선 방어를 위해 2개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병력을 인접 전선에서 차출해 소련군 공세 지점에 투입하면서 적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자 했으나 이 병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군 공세의 부분을 저지하는 것 뿐이었다. 주1)


중앙군은 또 다시 후퇴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나 민스크 서쪽의 요충지들을 잃는다면 폴란드 동부와독일 동부 국경지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손실을 감수하면서 진격해오는 소련군의 측면에 여러 차례 강력한 반격을 실시하였다. 주2) 7일까지 중앙군은 사망 3800명, 전투불능자 400명, 실종 5000명을 추가로 손실하였다. 소련 공군은 계속해서 독일 동부 산업지대를 공습하였다.


다음 날(8일)에도 소련군의 공세는 이어졌다. 소련군은 중앙군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여러 차례 집중적인 공세를 펼쳤다. 중앙군은 계속된 소련군 공세에 전선을 난타 당하면서도 민스크 서쪽의 요충지에 병력을 집중하고 그 외의 전선을 축소, 밀착시키면서 소련군 공세에 대응할력을 확보하는데 골몰하였다. 소련군은 공세를 계속해서 급조된 독일군의 후위를 물리치고 민스크 서쪽에서 재구축되고 있었던 중앙군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나 여전히 독일군에 비해 병력 손실이 많은 편이었다. 중앙군은 공세가 있은 후 잠시 뒤로 후퇴하여 돌파구를 틀어막았으나 돌파 당한 1차 방어선을 그대로 상실하고 말았다. 주3)


남부지역 소련군은 남부집단군을 드네프르강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엄청난 전력을 하르코프 북익에 집중하였다. 소련군은 여전히 기동전과 집중 돌파 전술을 통해서, 최종적으로는 중앙군 남익에서 방어선을 돌파하고 다른 병력들은 남부전선의 연결고리를 끊고 계속 전진해 남부집단군 북익에서 大 포위망을 구축해 중앙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주4)



※ 원 2차대전사 : 남부전선에서 벌어진 1943-44년의 방어전




소련군 공세에 따른 각 집단군의 전술적 대응 




중부지역 소련군은 기갑부대 투입을 초반에 회피하는 대신 포병 화력을 전선에 집중하여 돌파구를 열면 중무장한 보병이 이 돌파구를 개척, 확대해 나가고 이후에 기갑부대가 투입되어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중앙군은방어전에서 사전에 잘 만들어진 1차 방어선에 의존하여 방어를 펼쳤으나 만약 1차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면 속절없이 2, 3차 방어선도 없이 뒤로 밀려버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주5) 중앙군이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한 유일한 선택(The only correct solution)은 가용 병력의 이동 배치였다. 즉 방어선의 길이를 줄여서 이로 얻은 예비대를 위기에 처한 전선에 얼마나 빨리 이동시키며 방어와 반격을 수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또 한편으로 중앙군은 새로운 증원 부대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역시도 노르망디 상륙 이래 격화되는 서부전선의 위기 앞에 소련전선으로의 증원 역시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양 집단군과 서방군은 담당 전선에서 벌어지는 소련군 및 연합군 공세를 막기 위해 각 집단군 스스로가 가진 병력을 가지고 방어전을 치루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주6)    





■ 주석(Comment)




주1) 원 2차대전사 - 소련군 주공이 중앙군 전선이라는 것이 명확해진 1944년 6월 29일이 되어서야 육군 사령부는 뒤늦게 4, 5기갑사단 등 몇몇 사단들을 중앙군 전선으로 이동시켰으나 이 병력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련군의 2차 공세를 지연시키는 것 정도였다.



주2) 원 2차대전사 -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중부집단군은 공세 개시 약 2주 만에 30만 병력을 상실했고 모델 장군은 더 서쪽으로 후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이 반격은 독일과 루마니아 전선에서 기갑사단들이 이동해오기 시작한 1944년 7월말 경(다른 역자는 1944년 8월로 기술)이 되어서야 실시되었다.



주3) 원 2차대전사 - 전선에서 예비병력을 급조하여 돌파구를 틀어막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은 돌파구의 절반을 막지 못했다. 1943년 8월과 9월에 걸쳐 벌어진 남부지역 독일군의 절망적인 전투 중 일부이다.  



주4) 원 2차대전사 - 1944년 3월 4일 개시된 춘계공세에서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카메네츠-포돌스키에서 제1기갑군을 포위 섬멸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위치적으로 남부집단군 북익은 결국엔 중앙군 남익이기도 했다. 



주5) 원 2차대전사 - 1944년 6월 중부집단군의 파멸이 벌어지게 된 원인 중 하나는 1차 방어선에만 방어 진지가 구축된 상태에서

전선 측면에 대한 방어 구축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주6) 원 2차대전사 - 1943년 후반기에서 1944년 초까지 중앙군과 남부집단군은 서로가 각자가 가진 병력으로 전투하였다. 

독일 서방군은 바그라치온 작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전선으로부터 증원 부대를 받지 못하고 전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