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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아침햇발] 북한은 ‘친미 국가’가 될 수 있을까 / 고명섭 / 연합군 동진

Jacob, Kim 2019. 11. 15. 06:08








2019년 11월 12일자





[칼럼 전문]





북한은 친미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국제정치학적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북-미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금의 동아시아 정치지형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물음이고 반북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싫은 물음이겠지만, 역사의 큰 물줄기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을지 모른다.

베트남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베트남은 미국과 수십년 동안 적대했고 10년 동안 끔찍한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을 끝낸 지 20여년 만에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이래,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이 모두 베트남을 찾았다. 2018년에는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함이 다낭에 입항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확실한 친미 국가가 됐다. 베트남이 이렇게 미국과 가까워지게 된 배경에 중국이 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베트남은 수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력에 맞서 나름의 정체성을 지켜왔고, 1979년에는 중국과 국경분쟁으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베트남과 중국은 견원지간이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힘을 제어할 목적으로 베트남과 손을 잡았고, 베트남은 중국의 압력을 견제할 파트너로 미국을 받아들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는 것이다. 베트남은 공산당이 지배하지만 미국은 상관하지 않는다. 국익이 반공에 앞선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미국이 북한과 손을 잡는 것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북한과 베트남의 상황은 다르다. 북한은 중국과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이후 네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북한과 중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서고금에 찾아볼 수 없는 각별한 친선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북-중 친선보다 우위에 있는 북한의 대외관계 원칙은 자주 노선이다. 북한은 1960년대 중-소 분쟁 시기에 두 공산주의 대국 중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적 위치를 고수했다. 주체사상이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등장한 것도 그런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더구나 1992년 중국이 남한과 국교를 수립했을 때 북한은 중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중국을 믿을 수 없는 나라로 간주했다. 북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념적인 이웃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권을 지키며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줄다리기하는 관계다. 북한은 중국의 힘에 기대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 구심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한다. 북-중 밀착도 북-미 적대관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뒷배가 절실히 필요한 북한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과 북한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미국은 북한의 제1의 적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중국의 구심력을 중화할 수 있는 유력한 파트너로 떠오를 것이다. 그럴 경우 북한은 베트남과 유사해지며,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남한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남한이 ‘군사적 친미’와 ‘경제적 친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북한도 친중과 친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남한과 북한은 정치체제의 차이만 빼면 국제관계에서 크게 다를 게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남북의 상생·협력 공간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북한이 친미 국가가 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북한이 자주 노선을 지켜가는 데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이런 관계로 나아가려면 두 나라가 비핵화라는 당면한 난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북-미 사이에는 여전히 커다란 불신의 크레바스가 놓여 있다. 최근 북한은 김영철 명의로 낸 담화에서 미국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벗도 없다는 외교적 명구가 영원한 적은 있어도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격언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 이 문장의 강조점이 ‘벗’과 ‘친구’에 찍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북한이 ‘친미 국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러난 문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북-미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날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고명섭 ㅣ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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