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1945/독일-폴란드 분리선

◆[톱데일리] 2018년 6월 27일자 톱데일리 기사 발췌+

Jacob, Kim 2018. 6. 27. 22:38








[ 톱데일리 기사 발췌 ] 2018년 6월 27일자





...... (전략)




한편 26일 오후 7시 46분쯤 일본 도쿄 인근 지바(千葉)현 남부에서 진도 4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일본 기상청이 발표했다. 


진원의 깊이는 12㎞로, 이번 지진으로 지바현뿐 아니라 일본 도쿄 일대도 지진의 진동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뒤이어 이날 오후 8시 3분쯤엔 일본 이와테현에서 진도 3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일본 기상청은 전했다. 




...... (하략)




원 2차대전사·가상 2차대전사(공통)


소련 공군이 폴란드 동부와 독일 동부 산업지대에까지 공습을 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발틱해 연안 지대가 적군에게 넘어간다면 적 공군이 이 지역으로 재배치될 것이고 공습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또한 이곳에 잠수함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해군의 작전 영해도 함께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바그라치온 작전 이후 독일은 수도 베를린 방어가 더 시급했음에도 히틀러는 남은 북부집단군의 잔해를 쿠를란트 집단군으로 재편해 종전 시까지 주둔시켰다. 이 시기에는 점령지 방어보다도 군사적 필요가 더 우선시되어야 했다.  





가상 2차대전사(11) 소련군, 중앙 돌파 개시(계속)





스크 서쪽에서 방어선을 재구축하다.



중앙군은 6월 26일에 들어서면서 소련군 공격의 충격과 당혹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중앙군은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지휘 하에 필사적인 방어와 역습으로 민스크 서쪽에서 방어선을 재구축하고 있었다. 민스크는 6월 24일 저녁에 적군에게 탈환되었다. 주1)


케셀링 장군은 지중해 전역 2항공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2018년 5월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방어전을 지휘했다. 주2) 장군은 6월 1일짜 군 인사 개편을 통해 중앙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케셀링은 부임 후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백러시아의 수도인 민스크 동쪽까지 전선을 축소하여 군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소련군 공세 개시 4일 전이었던 6월 14일 무렵에 마무리했다. 케셀링은 공군 장성 출신이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방어전을 통해 지상군 지휘에도 능함을 인정 받았다.


한편, 남부집단군 북익은 중앙군이 소련군 공세에 밀려 서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중앙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20일). 주3) 소련군 공세는 이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군은 중앙군을 서쪽으로 밀어붙임과 동시에 중앙군과 남부집단군의 간극을 벌려 17년 겨울 이래 작전 목표였던 남부집단군 포위 섬멸 달성하고자 했다. 사령관 발터 모델 장군은 소련군의 심각한 압박 하에 놓여 있는 북익을 구원하기 위해 북익 측면에서 예비대를 투입해 몇 차례 반격을 펼쳤으나 강화된 적군 진지에 기갑병력을 들이받게 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주4) 남부집단군은 6월 말이 되어서야 북익에서 연결고리를 얇게나마 재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중간 결과



소련군은 공세 개시 6일 만에 집단군 사령부가 있었던 민스크를 탈환하고(24일) 중앙군을 서쪽으로 더 밀어부쳤다. 중앙군은 휘하에 몇 안 되는 예비대를 위기에 처한 전선에 선택적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주5)  

군은 6월 23일까지 휘하 병력의 대략 10% 손실을 입었으며 해결책은 더 서쪽으로 후퇴하는 것 뿐이었다.


중앙군은 적군의 초기 공세에서 허를 찔렸지만 며칠 이내에 예비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인 방어와 반격을 개시했다. 반대로 남쪽에서 개시된 소련군 협격 앞에 중앙군과 남부집단군의 연결고리가 끊어진다면 그 자체로 소련전선에서 파국을 목격할 터였다.


26일로 예상되었던 백러시아 전역 2차 공세는 앞서의 공세 흐름으로 볼 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6월 23일 소련군 공세는 중앙군 북익을 목표로 포위 공격을 펼치는 동시에 남익에 조공을 가해 예비대 이동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방어 부대인 3기갑군과 4군 전력만으로 집단군의 좌익을 지킬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중앙군은 자체 대책으로 4군의 전선을 축소하여 전선을 안정화하라고 지시하는 한편으로 북부집단군에 지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육군 사령부는 이를 승인하여 북방군 전선에서 일부 병력을 지원해 주었다. 주6)   


이 시기에 들면서 소련군은 부대를 조직하고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는 능력, 계획된 작전이 되지 않았을 때 사전에 만들어져 있었거나 상식 외의 다른 계획을 작전으로 옮기는 능력, 주 병력을 숨긴 채 진짜 목표에다 예비병력을 쏟아붓는 능력 등에서 독일군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2017년 여름 이래 투지 넘치고 강력해진 적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다. 독일군은 수동적인 방어보다는 공세에 강점을 가진 지상군이었으나 2017년 중반 이래 계속된 전선 축소에서 군 사령관들과 부대들은 "싸우면서 후퇴하라"는 어려운 임무를 묵묵히 다 하였다. 




■ 주석(Comment)



주1) 원 2차대전사 - 1944년 6월 28일자로 발터 모델이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으며 날짜로는 1944년 7월 4일이었다.



주2) 원 2차대전사 - 1945년 3월까지 이탈리아 반도 방어전을 지휘했고 이후 종전시까지 서방군 총사령관이었다.



주3) 원 2차대전사 - 4차 하르코프 공방전 이후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계속된 압박에 중앙군 남익과 연결고리가 끊어졌으나 하르코프 북익-아흐티르카 전선에서 4기갑군과 8군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8월 말 경에 얇게나마 연결고리를 재구축할 수 있었다.

(출처 : 만슈타인 회고록, 챕터 15. 1943-44년의 방어전)



주4) 원 2차대전사 -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 중 1943년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 이후 남부지역 독일군은 전면적인 후퇴 작전을 실시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주5) 원 2차대전사 - 남부집단군은 전선 방어를 위해 예비대를 위기에 처한 전선에 이쪽 저쪽으로 투입하면서 임시방편적으로 운용해야 했다. 이 결과로 예비대가 차출된 전선에서는 필연적으로 적군의 공격으로 인한 위기를 불러왔다.

(출처 : 만슈타인 회고록, 챕터 15. 1943-44년의 방어전)



주6) 원 2차대전사 - 1944년 3월 4일 개시된 소련군 춘계공세로 남부집단군은 원 방어선보다 더 서쪽으로 밀려서 후퇴해야 했다. 1944년 3월 21일로 1기갑군이 카메네츠-포돌스키에서 포위되면서 발생한 급박한 남부전선의 상황이다. 남부집단군은 약화된 4기갑군만으로 1기갑군을 구원할 수 없었기에 1기갑군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전선에서 병력을 지원받아야 했다. 결국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은 히틀러와의 면담에서 3월 25일자로 1기갑군을 포위망에서 탈출시키는 허가를 받아냈으며 서부전선에서 2개 기갑사단, 헝가리에서 2개 보병사단(1개는 경사단)을 지원받아 구원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출처 : Scoarched Earth, 카메네츠-포돌스키 포위전 편)